비타한방(Vita Hanbang) | 한방심리 칼럼

장애인의 이동권과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들
최근 한 유명 유튜버의 KTX 승하차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가 SNS와 유튜브에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승객의 하차를 돕는 과정에서 아찔한 상황이 발생했고, 이후 당사자가 현장 영상을 자신의 채널에 공개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저도 뉴스를 통해 관련 영상을 일부 보았습니다. 잘못하면 장애인에게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영상을 공개한 당사자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구독자 감소와 강연 취소 등의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논란의 방향이 조금 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당시 현장의 모든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당사자의 의도나 잘잘못을 판단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의 이동권과 권리, 그리고 그 권리를 보장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책임과 배려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은 언제부터 당연했을까
불과 몇십 년 전 한국 사회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은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경사로와 엘리베이터, 노약자석 등이 비교적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상황은 많이 달랐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가파른 계단은 휠체어 이용자에게 사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몸이 아프면 그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입니다.
노인들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시는 노인분들, 특히 할머니들이 참 많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시는 모습을 보면 대신 들어드리곤 했던 기억도 납니다.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지하철 계단이지만, 무릎이 아프고 다리에 힘이 없는 노인에게는 그 계단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문제를 사회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장애가 있으니까 힘든 것이다.”
“나이가 들었으니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런 변화 역시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노력해 온 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란의 당사자가 그동안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 이야기해온 노력 역시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권리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의 배려가 필요하다
어느 사회든 장애인, 노인, 임산부처럼 일상생활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책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노인과 임산부에게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누구나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런 부분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은 개인의 선의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버스에서도 휠체어 이용자가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버스가 잠시 멈추어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권리를 보장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수고와 입장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도 되는 것일까?“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권리를 보장하는 사람들의 수고도 존중받아야 한다
휠체어 이용자가 KTX를 이용하려면 경우에 따라 승하차를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경사로를 준비하고, 이동을 돕고, 안전을 확인하는 과정에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동이 들어갑니다.
그것이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공되는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수고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도움은 당연히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정해진 안전수칙을 지키고, 자신을 돕는 사람을 존중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상대방의 입장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
그 역시 권리를 누리는 과정에서 필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크고 작은 실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실제로 안전상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회사 측에 알리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것도 당연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의 목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이번 논란에서 또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은 누구의 목소리가 사회에 더 크게 전달되는가라는 점입니다.
유명한 장애인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은 장애인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는 데 분명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에게도 비슷한 불편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어려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겪는 불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크게 들리지 않습니다.
노인이 불편함을 이야기하면 때로는 “나이가 벼슬이냐”는 반응을 듣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도움이 필요하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수십만 명에게 전달할 플랫폼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대적인 박탈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지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말이 가진 영향력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유명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받은 도움이나 배려를 이야기할 때는, 그 과정에서 함께 움직였던 사람들의 입장과 수고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클수록 책임도 커지는 것.
저는 그것 역시 우리가 권리를 이야기할 때 함께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권리를 날카롭게 만들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느낄수록 자신의 권리에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 이것마저 양보해야 하나?”
이런 마음이 들면 작은 불공정도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권리가 어느 순간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마지막 몫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권리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내가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내가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면 나를 돕는 사람 역시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배려받았다면 그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권리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권리와 책임은 함께 가야 한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분명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리만 강조되고 책임이 사라지면, 어느 순간 그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특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장애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특혜라고 생각해서 줄여버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필요한 지원은 특혜가 아닙니다.
다만 그 지원을 제공하는 사람의 시간과 노동 역시 존중받아야 합니다.
장애인에게도 책임이 있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으며, 기업과 사회에도 각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은 권리를 갖느냐가 아니라 각자의 권리와 책임을 함께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의학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의 균형 – 중용의 미덕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없애야 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억울하면 화가 날 수 있고, 두려우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 감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감정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칠 때입니다.
억울함이 너무 커지면 상대방의 입장을 볼 여유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분노가 지나치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뉴스에서 접하는 보복운전도 비슷합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화가 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치면 상대방의 차를 가로막거나 물리적인 위협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은 무조건 참거나 적당히 타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맞는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상대방의 사정을 볼 수 있는 마음.
나를 배려해달라고 말하면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마음의 균형인지도 모릅니다.
권리에 따른 책임, 그리고 감사의 마음
과거에는 장애인과 노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불편을 감수하고 눈치를 보며 스스로 알아서 행동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사회가 계단을 낮추고,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교통약자를 위한 서비스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한 단계 더 생각해볼 것은 무엇일까요.
권리를 보장받는 것과 그 권리를 보장해주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함께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KTX 사고에서도 안전상의 문제나 개선할 부분이 있었다면 당연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돕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들의 입장과 수고도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억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어느 한 사람의 잘잘못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장애인의 권리도 존중하고,
노인의 어려움도 생각하고,
임산부의 불편도 배려하고,
그들을 돕는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의 목소리만큼 말할 힘이 없는 사람들의 불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은 권리를 갖느냐가 아닐 것입니다.
내 권리를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볼 수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조금 더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