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뒤에 숨은 눈빛 — 영화 《나이트크롤러》는 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가

비타한방(Vita Hanbang) | 시네마 마음처방 영화리뷰

나이트 크롤러(Nightcrawler)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는 2014년 개봉한 미국 스릴러 영화로, 댄 길로이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입니다.

제목의 ‘나이트크롤러’는 밤마다 사건·사고 현장을 쫓아다니며 자극적인 영상을 찍어 방송국에 파는 프리랜서 촬영업자를 뜻하는 업계 은어인데요,

영화는 좀도둑에 불과했던 주인공 루이스 블룸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점점 더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겉으로는 범죄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미디어의 선정성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루이스 블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첫째, 왜 그의 눈빛은 우리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드는가.

둘째, 그의 행동은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셋째, 결국 그를 성공시킨 것은 개인일까, 아니면 사회일까.

카메라 렌즈 같은 눈빛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고 ‘아.. 이 영화를 괜히 선택했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로 주인공 때문이었죠.

이 영화의 주인공인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남의 것을 갈취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윤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인물입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모습을 보입니다.

퀭하게 꺼진 눈두덩 안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질렌할은 이 배역을 위해 체중을 상당히 감량하고 수면 패턴까지 무너뜨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결과로 완성된 눈빛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 이 캐릭터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압축해놓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포착하고 자신의 이익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눈이었죠.

한의학에서 바라본 눈

한의학에서는 오래전부터 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신장어목(神藏於目, 정신이 눈에 깃든다)”이라는 오래된 관점이 있습니다.

《황제내경》에서도 “오장의 정기가 모두 눈으로 모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 상태 역시 눈빛을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루이스의 눈에는 사람을 향한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의학의 표현을 빌리면, 정신은 또렷하지만 그 정신이 타인을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상태처럼 보입니다.

이런 눈빛이 영화 내내 묘한 불편함을 만들어 냅니다.

루이스 블룸이라는 인물

영화 초반, 루이스는 고철을 훔쳐 파는 좀도둑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시계가 갖고 싶으면 때려 눕혀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잔인한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훔친 고철을 팔러 간 회사에 취업의사를 밝힙니다. 누구라도 당연히 좀도둑질을 하는 그를 고용할 리 없었죠.

그런데 그가 취업 면접에서 내뱉는 말들을 들어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그는 마치 경영 자기계발서를 통째로 암기한 사람처럼 말합니다.

“저는 근면하고, 배우는 속도가 빠르며, 동기부여가 확실합니다.”

문제는 이 말들이 어떤 진심이나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저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학습된 문장을 내뱉는 것 같습니다.

이 지점이 루이스 블룸이라는 캐릭터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뉴스 영상 판매업에 뛰어든 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이 바닥의 화법, 협상 기술, 심지어 방송국 프로듀서 니나를 다루는 방식까지 체득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서늘한 장면들은 대개 그가 사고 현장에서 피해자를 촬영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는 상대의 고통을 목격하면서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앵글을, 더 자극적인 구도를 찾아 움직이죠.

이때 그의 눈빛은 앞서 말한 ‘렌즈의 눈’이 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소재로, 프레임 안의 대상으로 처리하는 눈입니다. 더 소름 끼치는 지점은 그가 이 모든 걸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 없이 해낸다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윤리의 경계

루이스의 변화는 단순히 더 좋은 영상을 찍으려는 욕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고 현장을 남들보다 먼저 촬영하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스스로 윤리적 경계를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더 자극적인 화면을 얻기 위해 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위치를 몰래 옮기기도 하고, 같은 업종의 경쟁자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기자, 그는 그 차량의 엔진을 몰래 훼손합니다.

그리고 그 차량이 사고를 당하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 영상을 촬영합니다. 타인의 생명보다 특종이 먼저인 그의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살인 사건 현장에서는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가 시신과 범행 흔적을 촬영합니다.

심지어 범인의 차량 번호를 촬영해 놓고도 경찰에는 알리지 않습니다. 더 큰 사건이 벌어져야 더 가치 있는 영상을 얻을 수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자신의 조수 릭이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며 협상하려 하자, 루이스는 그를 위험 속으로 내몰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태연하게 카메라에 담아 방송국에 판매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루이스는 단 한 번도 죄책감이나 망설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좋은 화면’과 ‘성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대상이자 카메라에 담을 소재일 뿐입니다.

루이스 블룸은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가진 인물일까?

일상적으로 우리는 흔히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며, 연쇄살인법 같은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지칭합니다.

하지만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서 이에 해당하는 공식 진단명은 반사회성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ASPD)입니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는 범죄심리학이나 법정정신의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개념으로, 공식 진단명은 아닙니다. 선천적 기질(사이코패스)이냐, 후천적 환경(소시오패스)으로 기인한 것이냐에 따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주요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꼽힙니다.

  • 타인의 권리를 반복적으로 무시하거나 침해함
  •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고 위법 행위를 반복함
  • 자신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상습적으로 기만하거나 조종함
  • 충동적이며 미리 계획하지 않음
  • 자신이나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는 무모함
  • 지속적인 무책임함 (직장, 재정적 의무 등)
  •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한 후회나 죄책감의 결여

루이스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상당 부분 겹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만으로 그를 실제로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 과정을 거의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재료처럼 바라보며 범죄 행위를 행할 때에 큰 동요가 없다는 점을 보면 두 범주에 모두 속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공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공감을 바라보는 한의학의 시각은 조금 다릅니다.

맹자는 측은지심, 즉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인간다움의 출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마음이 없는 상태를 그는 사람답지 못함, 즉 비인(非人)에 가깝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황제내경》에서는 심(心)을 신명(神明)이 머무는 자리로 설명하며, 감정과 정신 활동의 중심으로 이해했습니다.

심장의 기가 온전할 때 사람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자연스럽게 감응한다고 보았고, 반대로 심신(心神)이 흐트러지거나 막혀 있으면 감정의 흐름 자체가 왜곡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한의학은 오래전부터 사람의 정신과 감정,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루이스 개인만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방송국 프로듀서 니나는 시청률을 위해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인 영상을 요구합니다. 그녀는 루이스의 방식이 비윤리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팔린다’는 이유로 계속 그를 찾습니다.

시청자는 더 충격적인 뉴스를 소비합니다.

루이스는 그 욕망을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충족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괴물은 루이스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을 계속 성공시키는 사회일까?

오늘날에도 비슷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와 SNS는 더 강한 자극을 경쟁적으로 보여줍니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추천합니다. 자극적인 영상일수록 더 많이 퍼지고, 더 많은 수익을 만듭니다.

루이스 블룸은 어쩌면 지금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유능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냉정하고, 효율적이며,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최적화하는 사람.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우리가 흔히 성공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즉 루이스 블룸은 시스템 바깥의 괴물이 아니라, 시스템이 보상하는 특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의 공감 없는 눈빛은 그래서 단순히 한 개인의 병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무엇을 ‘유능함’으로 정의하고 보상하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다시, 그 눈을 바라보다

다시 처음의 눈빛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루이스 블룸의 눈은 단순히 차가운 눈이 아닙니다. 공감 대신 계산이 자리 잡은 눈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반사회적 행동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정신의 흐름이 막혀 있는 상태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을 오히려 보상하는 시스템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이트크롤러》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의 괴물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무엇을 능력이라 부르고, 무엇을 성공이라 인정하는지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루이스 블룸의 눈빛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눈이 더 이상 스크린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곳곳에서도 낯설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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